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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신해철 10주기 - 음악으로 삶의 의미와 희망을 던져준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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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8회 작성일 24-10-1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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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 노래 그리고 말 한마디의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 오늘 주제는 이분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벌써 10년이 흘렀는데요. 여전히 그 이름 세 글자를 추억하고 그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주제는 하늘 어딘가에서 지켜봐 주시길 바라는 마음인데요.

음악으로 삶의 의미를 던져준 싱어 송 라이터이자 라디오 DJ이면서 시대의 논개 그리고 누군가에겐 좋은 상담자이자 인생의 멘토였던 가수 신해철입니다.


이분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현재 뮤지션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컸을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본인은 음악적인 소양이 전무했다고 생각했어.

성대 약대를 나와서 약사를 하다가 사업을 하신 아버지 이대 국문과를 나온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예술보다는 공부를 잘할 것 같은 집안인데 4살부터 피아노 학원에 가긴 갔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어머니한테 공부를 시키라고 하셨대 왜 싹이 보이는 애들은 바이엘 1번을 치다가 70번으로 점프를 하고 하는데 30번을 치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했대요.

연주보다 피아노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하고요.

오히려 미술 쪽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죠. 상도 많이 받고.

그런데 어머니가 음악 쪽에 더 관심이 끌리셨다고 해요.

어쩌면 아들의 정체를 알아보신 걸 수도 4학년 때 밴드부에 가입시켜서 클라리넷을 부르게 하셨는데 그때도 선생님들이 안타까워하면서 넌 참 인사성도 바르고 공부도 잘하는 애가 왜 아기는 이러면서 음악 점수도 낮았다고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다한증 손에 땀이 많이 나는 약점이 있었는데 악기를 다루는 데 치명적이었던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 때쯤 라디오에서 어떤 음악을 듣게 됩니다.

뭔가 기계적이면서도 때려부을 듯한 광란의 음악 듣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충만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고요.

이때부터 헤비메탈 사운드에 심취하기 시작한 거죠.

중학교에 가서도 하루 종일 음악을 듣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고요.

특히 스쿨피온스 같은 밴드를 좋아했고 외국 대중음악에 빠져서 친구들 사이에선 신 팝 칼럼리스트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해요.

그러다가 고비가 찾아옵니다. 가세가 기울면서 어려움을 겪은 거죠.

군밤 장사, 신문 배달도 하고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바로 이런 고비들이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계기가 될 그러면서 부모님 생각을 한 번 더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음악에 푹 빠졌어도 중학교 때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하고 3년 내내 거의 반탑을 놓치지 않았어요.


3등 밖으로 안 떨어졌다고 하고요. IQ 검사에서 150이 나왔다고 밝히기도 했고요.




아무튼 중학교 때는 음악을 듣는 데 만족했다면 고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직접 하게 되는데요.

밴드에 들어가서 일렉기타를 처음 만져본 거죠. 기타에 푹 빠져서 살았다고 합니다.

밴드 이름이 각 시탈이었는데 강북에서 꽤 유명해져서 따라다니는 여학생들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러면서 동시에 교내 방송반에도 가입해서 방송 일도 열심히 했다고 하고 방송 드라마 극본도 써서 전국대회에서 상도 받고 반장도 맡았다고 하는데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뭐든지 하나를 하면 진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근데 고등학교 때 수학시험에서 답안을 백지로 낸 적이 있었대요.

수학 선생님한테 뺨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수학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심지어 스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거죠.

고 이때에 반해서 10등 밖으로 밀린 적도 있었다고 하고요.

학력고사를 한 달 정도 앞두고 나름의 벼락치기를 해서 서강대 철학과 87학번으로 들어갑니다.


수학 점수만 엄청 낮았고 나머지는 거의 100점이라는 얘기도 했었어요.

대학생이 되고는 물만난 고기처럼 음악에만 몰두했습니다.

부활의 김태원을 찾아가서 기타를 배우기도 하고,




그리고 1987년 11월 말 신촌 이대앞 카페에서 5명이 모였는데요.

대학 연합 록밴드 무한궤도를 결성한 것. 어린 시절부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음악도 하면서 대학에도 다 잘 갔는데 다시 뭉친 겁니다.

명문대생들이 모인 것도 화제였는데 집안도 좋았어.

효성그룹 조성래 회장의 차남 조현문 씨가 키보드를 쳤고 쌍용그룹 김성곤 창업자의 외손주 조현찬 씨가 드럼을 쳤어.

지금은 방송사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지망생들이 두드릴 수 있는 문이 많이 없었어요.

가장 큰 문이 강변 가요제와 대학 가요제였는데요.

여름에 열리고 겨울에 열리고 그런데 여름에는 무한궤도로 뭉치지 못했습니다.

멤버들이 다 공부도 잘했다고 했잖아요. 한 명 빼고 음악보다 본업인 공부가 먼저라서 해외 연수도 가고 바빴다고 합니다.

대신 신해철은 아기 천사라는 그룹 사운드의 개건 보컬로 강변가요제에 나갔는데요.

전국에 방송되는 결선을 앞두고 라디오 중계만 되는 본선 3차에서 떨어졌어요.


학상대학교 철학과 2학년에 다니는 신해철입니다.

신해철 아귀 천사라고 합니다. 노래는 기다림은 사랑의 시작이야.

내 이 세상 살아가는 이 짧은 순간에도


그 대회 우승이 이상은 담다디 혹시 알아요? 이상우가 금상이었고 초대형 신인들의 레전드 배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 2분 날



그가 작사 작곡한 그대에게는 대학가요제의 대상을 거머쥐면서 큰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아버지한테 안 들키려고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문방구에서 산 멜로디언을 불면서 만들었다고 강변가요제를 거울 삼아서 전략도 잘 짰습니다.

전주부터 화려하게 치고 들어간다. 노래 자체는 단순해도 탈빛으로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는 멜로디로 현장 행사니까 쉬운 가사로 간다.

4분 동안 끊임없이 변한 지루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리듬 자체가 경쾌하고 수렴도 강렬해서 힘을 불어넣는 노래 삼십 년 넘게 한국의 대표 응원곡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대에게는 응원단 사람들한테 응원곡 이상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곡입니다.

이게 엄청 힘들거든요. 특히 첫 도입부 박수가 초스피드로 팔범을 뛰게 하는 것처럼 엄청 힘든데 나중에는 팔이 막 너덜너덜해진다고 할까 이게 벌써 30년이 넘게 내려오고 있잖아요.

선후배의 전통처럼 이어진 곡이니까 공통의 추억 같은 것도 나누게 된 아무튼 팀워크와 열정의 상징이고요.

그대에게가 언제부터 응원곡으로 쓰여졌을까 궁금했는데요.

그 대학가요제 이후에 무한궤도가 거의 매주 토토즐에 나왔거든요.

두 달째 응원단과 함께 공연을 하더라고요. 바로 응원곡이 된 거죠.

아무튼 대상 이후에 신해철은 아이돌 스타로 급부상합니다.

한 달 뒤에 MBC 라디오 진행자로 발탁되면서 라디오 DJ 생활도 시작했어.

그리고 1989년 6월 무한궤도 일집을 내놓습니다.


유명한 곡이 우리 앞에 생일 끝나갈 때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은 곡이죠.

그때 당시에 나왔던 노래들과 비교하면 다른 점이 확실히 있었던 것 같아요.

철학적인 면모와 실험 정신 같은 것들도 잘 보여줬고요.


거칠 것이 없었던 그의 행보에도 큰 위기가 몰려왔는데요.

대마초 흡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겁니다. 그리고 멤버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기면서 무한궤도가 해체되고 큰 고비를 맞아 나머지 무한궤도 멤버들은 공일오비를 결성했죠.

공일오비랑 무한궤도 영은 무 1은 한 오비는 오빗 그래서 공일오비가 된 거라는 설도 있습니다.

자칫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귀인이 있었습니다.

전도 유명한 대학생 가수의 손을 잡아준 것 가왕 조용필이었습니다.

대학가요제 당시 심사위원장으로 전주만 듣고도 대상이다.

직감을 하고 만점을 줬다는 얘기도 있던데 이후로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준 은인이기도 했어요.

자기 매니저였던 분을 소개해줬는데 이분이 대형 기획의 유재학 대표입니다.

전설의 매니저라고 불린 앨범을 내는 걸 도와주고 한편 신해철은 조용필을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꼽으면서 장군님이라고 불렀다고 하고요.

어떻게 형님이라고 할 수 있냐 했죠. 솔로 1집은 대박이었습니다.


타이틀곡이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강변가요제 출전곡인 기다리면 사랑의 시작이야를 편곡한 버전이었어.

영어 랩이 있었던 안녕 노래 실력이나 얼굴, 학력, 언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데다가 어리기까지 하니까 단숨에 아이돌로 떠올랐습니다.

그때 출연한 타이거 신발 광고가 대중적인 인기의 상징과도 같았어요.

슬픈 표정 하지 마 타이거가 있으니까 이듬해 솔로 이 집은 더 잘 됐습니다.

연속으로 히트를 치면서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를 잡았어요.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불과 23의 황태자로 등극한 거죠. 작사와 작곡, 미디 작업까지 거의 혼자 다 하면서 실력파 뮤지션이 될 조짐을 보여줬.

그렇게 솔로로 쭉 갔으면 어땠을까요? 상업적인 성공이 아른거렸지만 그걸 마다하고 다시 록밴드를 결성, 무한궤도 해체 이후에 밴드 활동에도 계속 목말라 했는데요.

1992년 넥스트를 결성하고 1집 앨범 홈을 냈습니다.

인형의 기사 팟 와 도심 록 음악을 통해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한 거죠.

제목부터가 범상치가 않죠. 이렇게 잘나가던 신해철에게 또 위기가 찾아옵니다.

1992년 12월 방위병으로 입대를 했는데요.

군생활 중에 선임병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요.

양쪽 무릎을 다 했고, 복무 중에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불명예 전역을 하고 재기가 어려울 거라는 얘기도 많았었어.

이 얘기하기 저도 좀 마음이 아픈데 본인에게도 큰 상처로 남은 사건이었고 하지만 매번 고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더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았고요.


고통스러운 순간 그야말로 악과 분노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음악적으로 마지막 음반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는데요.

정말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1994년 넥스트 이집입니다.

타이틀곡이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달라고 했던 나라라 병아리 또 더 드리머 디오션 불멸에 관하여


이듬해 넥스트 3집이 나왔는데요. 동성동본 금원법을 직격한 노래,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가 사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1997년에 싱글 앨범 히어라이스템포유에 이어서 애니메이션 라젠타의 사운드 댁이자 넥스트 4집을 냈고요.

맞아요. 하현우 씨


이렇게 거의 매해 앨범을 내면서 실험적인 음악으로 대중을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넥스트의 인기가 절정이던 1997년 마지막 날 팀 해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거기서 크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외국의 대중 음악가들과 교류했습니다.

솔로 3집 테크노 웍스 일상으로의 초대 이듬해에 민물장어의 꿈도 나왔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한데요. 고3 때 힘을 준 노래, 치열한 삶을 응원하는 노래 이 노래 가사가 묘비명이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어 있었는데 민물장어의 꿈은 귀족들이 너무 슬퍼서 차마 유비에 새길 수 없었다고 했고요.

히어라이스샘포유 가사가 묘비에 이렇게 쓰여져 있죠.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쯤입니다. 1998년 동아일보 기사에 마왕이라는 호칭이 처음 등장했더라고요.

거의 호처럼 불리고 있어 2천년 프로젝트 그룹 비트겐슈타인으로 저예산 홈 레코딩 앨범을 선보였는데요.

대중들에게는 다소 좀 난해한 곡들이기는 했죠.


하지만 이때부터 10년 넘게 진행한 라디오 프 고스트 스테이션과 고스트네이션으로 대중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거침없는 언변을 날리면서 진심이 담겨 있는 진행으로 마니아 청취자층인 고스족을 양산했고요.

2002년에는 미스코리아 뉴욕 진 출신의 골드만삭스에서 일했던 윤원희 씨와 결혼을 했어 부인의 암 투병 사실을 알면서도 결혼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감동을 주기도 했었죠.

정말 다정한 남편 아버지였더라고요. 동동이 아빠, 그리고 2004년 넥스트 ED o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에게 곡을 팔아야 하는 가수임에도 사회적 소신을 거침없이 밝혔습니다.

TV 가요 프로그램보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더 자주 볼 수 있을 정도였어요.

대마초 비범죄화를 시작으로 간통죄 폐지, 학생 체벌 금지 같은 당시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 논리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보여준 건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미움받을 용기였는데요.

특집 때마다 최고의 비정치인 논객으로 선정됐고, 손석희 앵커의 원픽 토론자로 꼽히기도 했고요.




이때쯤에 시트콤이랑 예능에도 출연했습니다. 안들의 대교주 역할을 맡으면서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요.

본인이 재미를 위해서 망가졌다고도 하고요. 스스로 실제 모습이랑 비슷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넥스트 6집으로 다시 음악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오랜 공백을 깨면서 특유의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 강렬한 록 사운드를 보여줬고요.

2012년에는 아쉽게도 11년 동안 진행했던 보스 라디오 방송이 끝났습니다.

고스족들이 정말 많이 아쉬워했죠. 그러다 2014년 6월에 드디어 솔로 앨범 리부트 마이셀프로 돌아왔죠.




제목처럼 다시 출발하고 새롭게 도전해보겠다는 의지를 꾹꾹 눌러 담았는데요.

철학적인 메시지와 음악적인 혁신도 가득했고요.

근데 이게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해 9월에 넥스트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으로 콘서트를 열면서 넥스트의 부활까지 예고했지만 2014년 10월 장협착증으로 수술을 받고 이후 안타깝게도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심정지 상태로 응급 입원을 했고요.

10월 2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46이라는 너무 이른 나이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슬픔에 빠졌습니다. 육교 위의 내문한 상자 속에서 처음 나와 만난 노란 병아리 엘리는 처음처럼 다시 조그만 상자 속으로 돌아가 우리 집 앞뜰에 묻혔다.

그가 노란 병아리 얄리를 집 앞길에 묻었던 1974년의 봄을 기억했듯이, 우리도 갑작스럽게 그를 마음속에 묻어야 했던 2014년의 가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그가 하늘의 별이 된 지도 10년이 지났는데요.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요? 언젠가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주길 바라면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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